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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핑 톰(Peeping Tom 관음증)의 어원과 악법 철회 사건


그녀는 6세기 이후 영국에 들어온 기독교를 신실하게 믿으며,
신 앞에 겸허한 마음을 가진 정직하고 숭고한 여인이었다.

고다이버는나날이 몰락해 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고

 남편의 과중한 세금정책을 비판한다.
신실한 믿음을 가졌던 고다이버는 가난한 농민들이

남편의 세금 때문에 굶어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세금을 줄여 영주와 농민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라고 남편에게 충고한다.

그러나 레오프릭은 고다이버의 말을 귓전으로흘려 보냈다.

그녀의 숭고한 마음을 비웃기도 하였다.

 레오프릭은 고다이버의 읍소가 그칠 줄 모르자 그녀에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고다이버의 농민에 대한 사랑이 진실이라면

 그 진실을 몸으로 직접 보이라는 것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나가

마을을 한 바퀴 돈다면 그녀가 그토록 호소하는

세금감면을 고려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고다이버는 갈등에 빠진다.

그러나 남편의 폭정를 막고 죽어가는 농민들을 구할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그 길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편의 제안을 수락한다.
이 일이 코벤트리의 농민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제 어느 때 레이디 고다이버의 거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도 알려졌다. 농민들은 영주의 부인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녀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농민스스로도 큰 결정을 내리게 된다. 레이디 고다이버가 벌거벗고 마을을 도는 동안
마을 사람 누구도 그녀의 몸을 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마침내 레이디 고다이버가 벌거벗고 마을로 내려온 날.

코벤트리 전체는 무거운 정적 속에서 은혜로운 영주부인의 나체시위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영주 부인을 위해

집의 창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친 다음 그 누구도

내다보지 않았으며 그 날의 일을 모두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이때 고디바 부인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을 커튼 사이로 몰래엿본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톰(tom)이라는 양복점 직원이었는데, 하늘이 노했는지 나중에 장님이 되고 말았다는 설이 있다.

 이 일화에서 유래하여 영국에서는 남몰래 엿보는 사람을

'피핑 톰(Peeping Tom 관음증)이라고 한다.

고다이버는 결국 백성들의 세금을 줄이는데 성공했고,

그녀의 이야기는 전설로남아 전해져 오고 있다.

by ㄷㄷㅐ꿍쓰 | 2008/06/18 14:25 | 꿍`s 나발림 | 트랙백 | 덧글(1)

광우병 그 진실과 배후는?

 


헐,,, 헐,,,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지??
이 사람말도 맞는거 같은데,,,,
헐,,, 헐,,,
혼란스럽네,,,ㅡㅡ;;;

소고기 진짜 괜찮은 건가?? 아,, 진짜,, 모르겠네,,

이 사람말 진짜예요??
알려주세요,,,,ㅠㅠ;;;;

이 사람말 맞으면 MBC 진짜 잘못한건데~

역시 내 귀는 팔랑귀야,,

아니네요,,,

끝까지 동영상 보니까,,, 이사람이 약간 좀 이상하단 느낌 오네요,,ㅋㅋ^^;;;;

by ㄷㄷㅐ꿍쓰 | 2008/06/17 19:54 | 꿍`s 나발림 | 트랙백 | 덧글(4)

나는 존귀한 사람

'마지막 천사가 창조되었을 때
그에게 '미니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모든 천사들 가운데 가장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천사들은 보통 끝에 '엘'이라는 철자를 가지고 있다.
미니멜이란 앞에 붙은 '미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작고 보잘것 없고 막내라는 그런 뜻일 게다.

 

당연히 천상에서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
미니멜은 절망하기 시작한다.
(천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다 해도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나게 아름답고 또 위대한 존재라고 저자는 토를 달았다.)

 

그래서 미니멜은 죽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천사는 불멸의 존재라, 자살이 불가능한 것,
방법은 하나. 자기를 만든 하나님에게 가서 자기를 다시
그냥 없애 달라고 부탁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사람들 세상에 피에타 상이 수백만 개 존재하고,
나이아가라 폭포가 수백 개,
에베레스트 산이 수백 개가 존재한다고
한번 가정해 봐라.

 

그것들은 더 이상 독창적이 아니니
그 절대적인 매력을 잃지 않겠느냐?

 

나의 창조물들을 자세히 살펴 보아라.
어떤 눈송이도 똑같이 생긴 것이 없단다.
나뭇잎이나 모래알도 두 개가 결코 똑같지 않다.
내가 창조한 모든 것은 하나의 원본이다.

 

따라서 각자 어떤 것과도 대치될 수 없는 거란다...
너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나는 너 없이도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지만
만일 그랬다면 세계는 내 눈에 영원히
불완전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너는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꿈꿔온 유일한 미니멜이다.
따라서 어느날 네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아느냐?
만일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할 수 없이 슬플 것이다.
영원히 눈물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

 

저는 이 글들을 한참을 붙들게 됩니다.
왜냐면...저도 종종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내게는 왜 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없을까?
하나님은 왜 내게 이런 재능은 주지 않으셨을까?

 

그런데...
정말....이 글이 가정한 것처럼...

나이아가라 폭포가 동네마다 있다면,
동네 뒤에는 다 에베레스트 산이 있다면,
피에타 상이 온 동네 교회마다 있다면(그것도 진품이^^)

 

입가에 번져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왜 에베레스트가 아니고 뒷 동산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내가 왜 나이아가라 폭포가 아니고 작은 개울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왜 피에타 상이 아니고 뚱뚱보 아저씨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가 너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가 너무 소중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저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
온 우주에 하나 밖에 없는 저를 위해

내일 새벽에도 저는 달리기를 할 것입니다...^^

 

 

[내 발의 등불] 닐 기유메트의 책에서 도움을 받다~

어느 작은 교회의 목사님의 글을 퍼왔습니다...

by ㄷㄷㅐ꿍쓰 | 2008/06/10 13:46 | 창조과학 | 트랙백 | 덧글(1)

기독교는 희망입니다.

6.25 전쟁시 압록강변에서 중공군의 침입으로 전선이 교착상황이 됩니다. 그러자 한미연합군안에도 부상병들이 속출하기 시작합니다.


그 무렵 어느 전선에서 부상당한 일단의 미 해병들이 추위에 떨며 트럭 옆에 쪼그리고 앉아 비상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종군기자 한 명이 지나가면서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만일 내가 신이라면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까요?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들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때 그들이 했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추위, 부상,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는 그들은 어떤 대답을 했을까요? 그들은 이런 대답을 합니다. “우리들에게 제발 내일을 주십시오. 내일의 확신을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내일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다는 그 희망을 달라는 것입니다. 보장된 내일이 있다면 나는 이 시간을 참아낼 수 있으니 희망을 달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임상진단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삶이 불편해서 자살하는 사람은 없다. 희망이 없어서 자살하는 것이다.”
헬렌켈러가 어느 날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세상을 살아오며 당신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그 장애 때문에 불행했던 적 없습니까?


그 질문에 대해 헬렌 켈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맹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희망과 비전이 없는 것이 불행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불트만은 ‘희망의 신학’을 노래합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더 이상 인간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그런 어두운 시대에, 인간은 평화를 만들어낼 수 없고, 오직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그런 미가치한 존재라는 인식이 온 세계에 편만할 때, 불트만은 희망의 신학을 들고 나옵니다.
독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조용기 목사님 또한 ‘희망의 목회’를 제창합니다.

하지만 굳이 희망의 신학과 희망의 목회를 말하지 않아도 기독교 자체가 희망입니다. 기독교는 그 자체로 희망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 옆에 가보면 희망을 느끼고 따뜻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희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by ㄷㄷㅐ꿍쓰 | 2008/05/24 18:37 | 창조과학 | 트랙백 | 덧글(2)

518민주화운동과 중국대지진을 바라보는 한국교회와 반성


 잡혀가는 남편의 상처를 치료해주려는 아내의 모습이다. 수많은 사람이 우리나라 군인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아직도 실종되어 돌아 오지 못하는 사람도 엄청난 수에 이른다. 그들의 아픔을 우리가 어찌다 알수 있을까. 당시 한국교회는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본다. 수동적인 잘못이었다곤 해도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는다고 하는 성경 말씀에 비추어 어떻게 보면 죄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일이다. 한국교회는 가족을 잃고 고통스러워 하는 자들에게 정부를 "용서"하라고 말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 일거라 전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정부에 대해서는 성실하게 침묵을 치켰다. 세상이 세워준 권위와 법 또한 인정하라는 단편적인 성경 말씀을 오해하여 발췌했을 터이다. 한국교회가 유족들에게 "용서하십시요"라고 말했을때 그들은 "누가 우리 아들을 죽였는지는 알아야 용서 하던지 말던지 할것 아닙니까!" 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밑도 끝도 없이 용서하라는 말에 그런 대답은 누구라도 이해할 만하다. 예수님도 친구의 죽음앞에 목놓아 울지 않았던가! 용서, 세상의 권위 다 거두 절미 하고 한국교회는 눈물을 잃어 버렸다.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그 긍휼의 눈물을 예수그리스도의 눈물을 잃어버렸다.


 얼마전 중국의 대지진, 어떤 목사님들께서(난 일부의 목사님이라 확신한다)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쓰나미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고 미얀마의 태풍을 보면서도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분들을 본다. 난 모르겠다. 그게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그렇치만 자신이 자기 아들(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까지 생명을 주려했던 우리 인간의 생명을 한순간에 이렇게 빼앗아가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원래 잔인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부의 저런 목사님의 의견을 부분 수용 할 수 있겠지만 내 생각은 아니다. 한국교회는 이들을 위해 함께 아파해야 한다. 지금은 그러해야 할때다. 함께 힘을 모아 뜻을 다해 도와야 할때이고 눈물흘려야 한다. 원자바오 총리의 한방울 눈물은 중국대륙을 적셨다. 한국에 있는 내가 이곳에서 울어 뭐하겠냐마는 그것이 인간일 테고, 그것이 전해질수있는 유일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by ㄷㄷㅐ꿍쓰 | 2008/05/20 11:45 | 꿍`s 나발림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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